유럽 방위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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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방위 공동체(EDC)는 1950년대 초 냉전 시대에 유럽의 안보 강화를 위해 제안된 초국가적 군사 동맹이다. 미국과 서방 진영의 안보 강화를 위해 서독의 재무장을 고려하던 중, 프랑스 총리 르네 플레뱅이 주도하여 유럽군의 창설을 목표로 하는 플레뱅 계획을 제안하며 구체화되었다. EDC는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국가를 포함할 예정이었으며, 미국은 제외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54년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비준이 거부되면서 무산되었고, 서독은 대신 NATO에 가입했다. EDC는 실패했지만 유럽 통합과 방위 통합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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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방위 공동체 | |
---|---|
조약 정보 | |
명칭 | 유럽 방위 공동체 설립 조약 |
![]() | |
유형 | 군사 협정 |
배경 | 냉전, 유럽 통합 |
초안 작성일 | 1950년 10월 24일 |
서명 장소 | 파리 |
서명일 | 1952년 5월 27일 |
발효 조건 | 모든 회원국의 비준 |
수탁 기관 | 프랑스 정부 |
만료일 | 발효 후 50년 |
발효일 | 미발효 |
참가국 | |
사용 언어 | (정보 없음) |
위키문헌 | 프랑스어 원문 |
추가 정보 |
2. 배경
1940년대 후반, 냉전의 심화는 유럽 대륙에 분열과 안보 불안을 야기했다.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했고, 서유럽 국가들은 잠재적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서방 진영의 방위력 강화를 위해 서독의 재무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6]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1950년 8월, 윈스턴 처칠은 유럽 평의회 연설을 통해 독일군을 포함한 공동 유럽군 창설을 제안했다.[7] 유럽 평의회는 이 제안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며 유럽 공동 방위 체제 논의의 시작을 알렸다.[7] 이는 이후 유럽 방위 공동체 구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냉전과 서독 재무장 문제
1940년대 후반, 냉전으로 인한 분열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다. 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유럽과 서방 진영 전체의 안보 강화를 위해 서독의 재무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6]1950년 8월, 윈스턴 처칠은 유럽 평의회 연설에서 독일 군인을 포함한 공동 유럽 군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는 "우리는 통일된 지휘 하에 모든 국가가 가치 있고 명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유럽 군대를 즉시 창설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실질적이고 건설적인 지침을 제시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7]
유럽 평의회는 이후 영국이 제출한 결의안을 채택하며 처칠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결의안은 "평화 유지를 위한 헌신과 침략으로부터 평화로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행동을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기 위해 적절한 유럽 민주적 통제를 받고 미국 및 캐나다와 완전히 협력하는 통일된 유럽 군대를 즉시 창설할 것"을 촉구했다.[7]
1950년 9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의 건의에 따라 유럽 국가들에게 '패키지'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나토의 방어 체제를 강화하고 12개 사단 규모의 서독군 창설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일으킨 참상을 기억하는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독일 군대의 재건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8] 한편,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공동 군대 창설을 통해 유럽 통합을 진전시킬 기회로 여기기도 했다.[9]
2. 2. 플레뱅 계획
1940년대 후반, 냉전의 심화로 유럽의 분열이 뚜렷해졌다.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고, 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잠재적 위협에 취약함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서유럽과 서방 진영 전체의 안보 강화를 위해 서독의 재무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6]1950년 8월, 윈스턴 처칠은 유럽 평의회 연설에서 독일군을 포함한 공동 유럽군 창설을 제안했다. 그는 "우리는 통일된 지휘 하에 모든 국가가 가치 있고 명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유럽 군대를 즉시 창설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실질적이고 건설적인 지침을 제시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7] 유럽 평의회 의회는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화 유지를 위한 헌신과 침략으로부터 평화로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행동을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기 위해 적절한 유럽 민주적 통제를 받고 미국 및 캐나다와 완전히 협력하는 통일된 유럽 군대를 즉시 창설할 것을 촉구합니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7]
같은 해 9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고등 판무관 존 J. 맥클로이의 건의에 따라 유럽 국가들에게 '패키지'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NATO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12개 사단 규모의 서독군 창설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는 독일군의 재건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8]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유럽 통합을 강화하고 독자적인 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할 기회로 삼고자 했다.[9]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50년 10월 24일, 프랑스 총리 르네 플레뱅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비록 실제 초안은 장 모네가 작성했지만, 이 계획은 플레뱅의 이름을 따 '플레뱅 계획'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초국가적 성격의 유럽군 창설이었다. 프랑스는 이를 통해 미국의 서독 재무장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10][11] 플레뱅은 1950년 프랑스 의회 연설에서 "유럽의 운명이 평화에 달려 있으며 유럽의 모든 국민이 집단 안보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하는 프랑스 정부는 [...] 공동 방어를 목적으로, 통합된 유럽의 정치 기구와 연결된 유럽군의 창설을 제안합니다."라고 밝혔다.[12]
플레뱅 계획에 따른 유럽 방위 공동체(EDC)는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을 회원국으로 구상했다. 미국은 이 공동체에서 제외되었으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는 별개로 프랑스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럽 중심의 안보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앞서 슈만 선언이 석탄과 철강 자원의 공동 관리를 통해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통제하려 했던 것처럼, 플레뱅 계획 역시 군사적 측면에서 독일의 독자적인 군사력 보유를 막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영국은 계획의 원칙에는 동의했지만, 초국가적 성격이 완화되어야만 참여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13]
플레뱅 계획에 따르면, 유럽군은 각 회원국에서 파견된 군대로 구성되며, 회원국 국방장관들로 이루어진 각료회의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약간의 의구심과 망설임도 있었지만, 결국 미국과 ECSC의 6개 회원국은 플레뱅 계획의 기본 원칙을 승인했다.
3.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 체결 및 비준 과정
플레벤 계획을 바탕으로 1951년부터 초국가적 군대 창설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프랑스의 주권 우려와 미국의 서독 재무장 요구 속에서 절충안으로 유럽 방위 공동체(EDC) 구상이 구체화되었다.[14] 1952년 5월 27일, 벨기에,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6개국 외무 장관은 파리 조약에 서명하여 EDC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15]
그러나 조약 비준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의회가 1954년 8월 30일 비준을 거부하면서[20] 조약은 최종 무산되었다. 이탈리아 역시 프랑스의 비준 실패 이후 비준 절차를 중단했으며,[16][17] 나머지 4개국(벨기에,[18][19] 서독,[21] 룩셈부르크,[22] 네덜란드[3][23])만이 비준을 완료했다.
3. 1. 조약 체결
1951년 2월, 플레벤 계획의 초기 승인에 따라 초국가적인 군대의 구조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회담이 시작되었다.그러나 프랑스는 안보와 국방 분야에서 국가 주권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완전한 의미의 초국가적 유럽 군대 창설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 군대의 창설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고, 이에 따라 수정된 플레벤 계획 초안이 1952년 5월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 유럽 방위 공동체(EDC)로 명칭을 변경하여 마련되었다.
결국 여러 타협과 의견 차이가 존재하는 가운데, 1952년 5월 27일 관련 6개국의 외무 장관들은 유럽 방위 공동체(EDC)를 설립하는 파리 조약에 서명하였다.[15]
3. 2. 비준 과정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은 각 서명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했으나, 프랑스의 비준 실패로 최종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역시 비준 절차를 중단했다. 나머지 4개국(벨기에, 서독,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은 조약을 비준했다.[16][17]서명국 | 기관 | 투표 | 참고 | |||
---|---|---|---|---|---|---|
날짜 | 찬성 | 반대 | 기권 | |||
벨기에 | 상원 | 1954년 3월 12일 | 125 | 40 | 2 | [18] |
하원 | 1953년 11월 26일 | 148 | 49 | 3 | [19] | |
프랑스 | 국민의회 | 1954년 8월 30일 | 264 | 319 | 31 | [20] |
상원 | 중단 | ? | ||||
서독 | 연방의회 | 1953년 3월 19일 | 224 | 165 | ? | [21] |
연방상원 | 1953년 5월 15일 | ? | ? | ? | [21] | |
이탈리아 | 상원 | 중단 | ? | |||
하원 | 중단 | ? | ||||
룩셈부르크 | 의회 | 1954년 4월 7일 | 47 | 3 | 1 | [22] |
네덜란드 | 하원 | 1953년 7월 23일 | 75 | 11 | 0 | [3] |
상원 | 1954년 1월 20일 | 36 | 4 | 10 | [23] |
3. 2. 1. 프랑스의 비준 거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서명국이 조약을 비준했다. 이탈리아 의회는 프랑스의 비준 실패로 인해 비준 절차를 중단했다.[16][17]유럽 방위 공동체(EDC) 조약은 1954년 8월 30일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비준을 위한 투표에 부쳐졌으나, 찬성 264표, 반대 319표로 부결되었다.[20]
투표 당시, 요제프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 전쟁의 종식으로 미래의 갈등에 대한 우려는 점차 희미해졌다.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와 더불어, 1950년의 최초 플레벤 계획과 1954년에 부결된 계획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존재했다. 군사 통합 수준이 대대급에서 사단급으로 변경되었고, 지휘 구조가 변경되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SACEUR)이 EDC 작전 역량을 담당하게 된 점 등이 주요 차이점이었다.
조약 비준이 실패한 이유는 국제 정세의 주요 변화와 프랑스 제4공화국의 국내 문제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24] 골주의자들은 EDC가 프랑스의 국가 주권을 위협한다고 우려했고, 프랑스 공화국의 불가분성에 대한 헌법적 우려, 그리고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를 자본주의 미국에 묶어두고 공산 블록에 반대하도록 하는 계획에 반대했다. 다른 입법자들은 영국의 부재에 대해 우려했다.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는 다른 서명국들과 추가 의정서를 비준하려 시도하여 조약 반대자들을 달래려 했다. 여기에는 서독 내에 배치된 병력 중 지원 부대만 통합하고, 예산 및 기타 행정 문제와 관련하여 더 큰 국가 자율성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EDC 계획은 결국 프랑스 의회에서 비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붕괴되었다.
4. 계획된 조직
유럽 방위 공동체는 범유럽 군대를 구성하고, 이를 국가별 부대로 나누어 공통 예산, 공통 무기, 중앙 집중식 군사 조달, 그리고 공동 기구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4. 1. 유럽 방위군 구성
유럽 방위 공동체는 범유럽 군대를 구성하고, 이를 국가별 부대로 나누어 공통 예산, 공통 무기, 중앙 집중식 군사 조달, 그리고 공동 기구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제안된 유럽 방위군의 총 규모는 43개 사단이었으며, 주요 국가별 기여는 다음과 같다.[3]
국가 | 기여 병력 | 비고 |
---|---|---|
프랑스 | 14개 사단 | 항공기 750대 |
서독 | 12개 사단 | 공군 보유는 가능했으나, EDC 조약에 따라 군용기, 원자 무기, 유도 미사일 및 전함 건조는 금지될 예정이었다. |
이탈리아 | 12개 사단 | 항공기 450대 |
베네룩스 | 5개 사단 | 항공기 600대 |
4. 2. 회원국별 역할
유럽 방위 공동체(EDC)는 범유럽 군대를 구성하여 이를 국가별 부대로 나누고, 공통 예산, 공통 무기, 중앙 집중식 군사 조달 및 관련 기구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제안된 총 43개 사단 규모의 병력에 대한 주요 회원국의 기여는 다음과 같다.[3]
- 서독은 공군을 보유할 수 있었으나, EDC 조약에 따라 군용기, 원자 무기, 유도 미사일, 전함 건조는 금지될 예정이었다.
이 군대 내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군대는 각자 자국 정부에 보고하는 반면, 서독 군대는 유럽 방위 공동체(EDC)에 직접 보고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 가능성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를 반영한 조치로, 서독 정부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제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조약이 비준되지 않을 경우, 서독 정부가 자체 군대를 통제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된 상태였다.
4. 3. 유럽 정치 공동체 (EPC)와의 연계
유럽 정치 공동체(EPC)는 1952년 기존의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와 제안된 유럽 방위 공동체(EDC)를 결합하는 형태로 제안되었다. ECSC 의회(현재의 유럽 의회)가 작성한 EPC 조약 초안은 직접 선출된 의회("국민 의회"), 각국 의회가 임명한 상원, 그리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초국가적 행정부를 포함하는 구조였다.그러나 유럽 방위 공동체가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비준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면서, 유럽 정치 공동체 프로젝트는 1954년에 실패했다. 이는 국가 주권의 과도한 상실을 우려했기 때문이다.[4][5]
EPC 구상이 무산된 후, 유럽 지도자들은 1955년 메시나 회의에서 만나 스파크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이는 이후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설의 길을 열었다.
5. 무산 이후
유럽 방위 공동체(EDC) 조약은 1954년 8월 30일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비준 투표에 부쳐졌으나, 찬성 264표, 반대 319표로 부결되었다.
투표 당시, 요제프 스탈린의 사망과 한국 전쟁의 종식으로 인해 미래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다소 완화된 분위기였다. 또한, 1950년 처음 제안되었던 플레벤 계획과 1954년 부결된 최종안 사이에는 군사 통합 수준(대대급에서 사단급으로 변경)이나 지휘 구조(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SACEUR)이 EDC 작전 역량 담당)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약 비준 실패는 국제 정세 변화와 프랑스 제4공화국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24] 골주의자들은 EDC가 프랑스의 국가 주권을 침해하고 공화국의 불가분성 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으며,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깊은 우려도 존재했다.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이 계획이 프랑스를 자본주의 미국에 종속시키고 공산권에 대항하게 만들 것이라며 반대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주요 파트너인 영국의 불참을 문제 삼기도 했다.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당시 총리는 서독 내 병력 배치 문제나 예산 및 행정 문제에서 각국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추가 의정서를 제안하며 조약 반대자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결국 프랑스 의회의 비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EDC 계획은 무산되었다.
EDC 조약이 발효되지 못하자,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는 길을 택했고,[25]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들은 드골 대통령의 주도로 푸셰 계획(1959-1962)을 통해 외교 정책 협력을 모색했다. 이후 유럽 국가 간 외교 정책 협력은 유럽 정치 협력(EPC, 1970)으로 이어졌고, 이는 현재 유럽 연합의 공동외교안보정책(CFSP)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유럽 연합(EU)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그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서유럽 연합(WEU)은 EDC가 구상했던 여러 기능들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EDC가 목표로 했던 강력한 초국가주의적 군사 통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6. 역사적 의의와 영향
유럽 방위 공동체(EDC) 조약은 최종적으로 발효되지 못했다. 특히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비준이 실패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서독은 NATO에 가입하게 되었다.[25]
EDC 실패 이후, EEC 회원국들은 드골 대통령이 후원한 푸셰 계획(1959-1962)을 통해 외교 정책 분야에서 협력을 시도했다. 이후 유럽의 외교 정책 협력은 1970년 유럽 정치 협력(EPC)의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현재 유럽 연합의 CFSP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유럽 연합과 NATO, 그리고 해체된 서유럽 연합은 과거 EDC가 구상했던 기능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EDC가 목표로 했던 초국가주의적 성격의 강력한 군사 통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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